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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6. <요재공>농암공휘경열행록실기(農庵公諱慶烈行錄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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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요재공>안곡공휘학겸행록(安谷公諱學謙行錄)
<요재공후>안곡공행록(安谷公行錄) 公自幼志學養以道義慕古而不滯處世而不流受學于羅處士致一之門耳承面受專心劬經踐履益篤所守卓然嘗曰人於外物超然脫落方是士君子胸懷又曰科學之壤人無異異端學者先絕於此然後可與語天德王道常愛誦朱子學者須是革盡人欲復盡天理方是學之說而自以激仰鉗鎚感歎為詩曰舜跖利善分孔陽仁慾異學顏即顏徒從墨真墨氏又詠邵子觀物安心之詩有樂仁見道之像其所知者有如此矣嘗築室於其先祖翰林公墓下韜名鏟跡婆娑自適孝養其親不以貧寠匱梁肉友于其弟極其相好和以接人不設哇畛凡事為之間無論小大深察義理之恰好與否恰好者決定如此不恰好者決定不如此以故宗黨服其仁鄉隣悅其義及其晚年德崇行尊又持欒共子生三事一之戒鳩財置田為羅處士養送無憾之備其所行者有如此矣所謂知行並進者豈非公哉李公晚永宰雪山聞公德義屢枉筇轡累煩書尺許以道義有以銀山鐵壁為言矣自是以來連登繡剡竟不調公議惜之鳴呼狀人之德譬如寫真一毛一髮苟不相似便非其人顧以顓蒙雖不敢忝在外裔有所曠感謹就公詩稿與家牒錄其行治如茲別繫姓諱世德子孫于下方公諱學謙字郁汝安谷其里名而因以為號玉川趙氏系出高麗檢校大將軍諱璋世襲珪組蜂職相望至本朝翰林諱九龄益大而昌於乎盛矣公高祖曰諱晚錫曾祖曰諱匡時祖曰諱日升考曰諱昌業妣星山李氏甲松女公生於己卯段歿辛卯葬於郡 南品谷而嶝洞坐酉原配南原梁氏重元其考也先公十六年而歿墓在毛老亭先塋向丙原生一男曰星五五星生五男三女男曰道鎮曰義鎮曰載鎮曰翼鎮日復鎮女適清州韓濮興德張祿南陽洪在昌在昌即我王父也南龜為玄翼珣妻者道鎮出東洙炯淳東淳為姜大囿崔在龍妻者義鎮出南龍永淳益淳載鎮出基淳樂淳翼鎮出鶴淳俊淳相淳達淳為楊錫琳申麟求妻者復鎮出玄外以往不可盡記 外裔南陽 洪淳瓚 謹述 안곡공행록(安谷公行錄) 공이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도의(道義)로써 이르고 옛을 생각하여 폐하지 아니하며 세속에 따라 흐르지 아니하였다. 라처사치일(羅處士致一)의 문하에 수학하며 귀로 듣고 낫으로 받어 정신을 오로지하여 글을 힘쓰니 품행이 독실하고 지킨바가 탁월하였다. 일찍 말하되 사람이 외물에 초연(超然)한 것이 사군자(士君子)의 깨끗한 심정이라하고 또 과거가 사람을 버린 것이 이단(異端)과 같다하며 학자가 먼저 이것을 끊은 연후에야 가히 더불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말하리라 하였다. 항상 주자(朱子)가 말씀하신 학자는 모름지기 인욕(人欲)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따라야 바야흐로 배웠다 할 것이다. 그 말을 스스로 감탄하여 흥분하고 입을 다물고 시를 지어 갈오되 순인군과 도척은 이 끝과 착한 것으로 분간하고 공자와 양회는 어진 것과 욕심으로 다루더라(舜跖利善分孔陽仁慾異) 안자를 배우면 곧 안자의 무리요 묵적을 따르면 참묵씨가 되느니라(學顏即顏徒從墨眞墨氏) 또 소강절(邵康節)의 물건을 보고 마음을 편안히 하였다. 시를 읊으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도를 본형상이 있으니 그견식이 이와 같았다. 신해(辛亥)一七九一년 봄에 그 선조 한림공 묘소 아래 집을 지어 안곡제(安谷齋)라 현판하고 이름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한가하고 편안히 지내며 효도로써 그 어버이를 봉양하되 가난함에도 좋은 반찬을 떨추지 아니하고 그 아우와 우애하여 지극히 서로 좋아하며 화기로서 사람을 대하고 간격을 만들지 아니하셨다. 대범 일을 처리할 때 대소를 막론하고 깊이 의리에 맞나 안 맞나를 살펴 처리하니 종족과 향방이 그 덕의를 감복하였다. 만년(晩年)에 덕이 높으고 향력이 높은데도 또 란공자생 삼사일의 경계를 지켜(欒共子生事一之戒) 재물을 모아 제위답을 사서 나처사(羅處士)가 말한 살아서 봉양하고 죽어서 보낸데 여감이 없도록 준비하여 그 행한바가 이와 같으니 이른바 알고 행하기를 같이한 자 어찌 공이 아니겠는가. 이공만영(晚永)이 옥과 현감으로 있으면서 공의 덕행을 듣고 자주 심방하고 또 서찰을 보내 도의로써 허락하고 굳은 절행이 있다 하였다. 이로부터 계속 과거를 보았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다 말하였다. 슬프다. 사람의 덕행을 글로 쓰면서 사진(寫眞)에 비하여 머리털 한 개라도 틀리면 도시 그 사람이 아닌 것이다. 돌아보건데 우졸(愚拙)한자가 비록 외람한 일이나 욕되게 외손의 서열에 있음으로 아득히 느낀바 있어 삼가 공의 시고(詩稿)와 가첩(家牒)을 살펴 그 행록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별도로 성(姓) 휘(諱) 세덕(世德) 자손을 하단에 기제함 공의 휘는 학겸(學謙)이요 자는 욱여(郁汝)이며 안곡은 그 마을 이름인데 인하여 호를 하였다. 옥천조씨는 고려검교대장군 휘 장(璋)을 시조로 대대로 고관대작을 세습(世襲)하다가 본조에 이르러 한림구령(翰林九齡)이 더욱 창대하였으니 아아 거룩하도다. 고조의 휘는 만석(晩錫)이요 증조의 휘는 광시(匡時)며 조의 휘는 일승(日升)이고 고의 휘는 창업(昌業)이요 비는 성산이씨 갑송녀(妣星山李氏甲松女)이었다. 공이 기묘(己卯) 一七五九년에 출생하여 신묘(辛卯) 一八二一년에 별세하니 군남품곡면등동좌유원(郡南品谷面嶝洞坐酉原)에 안장하고 배는 남원양씨 중원녀(配南原梁氏重元女)인데 공보다 十六년 먼저 저별세하여 묘소는 모로정(毛老亭) 선영향병원(先塋向丙原)에 있다. 남은 성오(星五) 요 손남은 도진(道鎭) 의진(義鎭) 재진(載鎭) 익진(翼鎭) 복진(復鎭)이며 손녀는 청주한복(淸州韓濮) 흥덕장록(興德張祿) 남양홍재창(南陽洪在昌) 처인데 재창은 곧 내의 왕부(王父)이다. 증산 남구(南龜) 현익순처는(玄翼珣妻) 도진 출이요 동수(東洙) 형순(炯淳) 동오(東淳) 강대유(姜大囿) 최재룡(崔在龍) 처는 의진출이며 남용(南龍) 영순(水淳) 익순(益淳)은 재진출이고 기순(基淳) 낙순(樂淳)은 익진출이요 학순(鶴淳) 준순(俊淳) 상순(相淳) 달순(達淳) 양석림(楊錫琳) 신인구(申麟求) 처는 복진출 이며 그외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외예남양(外裔南陽) 홍순찬(洪淳瓚) 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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